질문편
어렸을때 내가 크면 아버지의 저런 모습은 닮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 보니 아버지와 그대로 닮아 있는 나를 본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싫은 모습을 아들에게는 넘겨주지 않기 위해서 무단히 노럭한다.
그런데 희망과는 반대로 자라면서 나의 싫은 모습을 그대로 닮아 가는 子息을 본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나의 아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 없는 무엇인가에 갇힌 기분을 느낀다.
이것이 "매트릭스인가"하는 기분이 들때도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고의 범위내에서는 안될 것 같은 한계를 가끔 느낀다.
뫼비우스의 띠를 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나의 아버지도 이런 한계를 느꼈을까?
나의 아들도 나중에 이런 한계를 느끼게 될까?
한계에 대한 절망감을 子息에게서 끊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나이가 들다 보면,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모든 세상사에는 항상 양면이 있다는 것이다.
장점에는 단점이 있고, 단점에도 장점이 있다.
장점이 없으면 단점도 없다. 그리고 단점이 없으면 장점도 없다.
인생의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듯 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면 그 노력으로 결국에는 또 다른 대가를 치르게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子息들의 인생을 바꾸겠다고 하는 것은 정말 허망한 일인가?
설령 부모가 원하는 것을 子息에게서 얻게 되더라도,
그로 인해서 다른 단점이 생길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식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답변편
가장 이상적인 자식 농사는 '있는 그대로의 自身을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키우는 일이라고 본다.
그것이 모든 것의 기본이다.
행복한 인생, 의미 있는 인생, 가치있는 인생 등, 모든 인생의 기본이다.
이를 위해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인터스텔라'라는 영화 대사에서 그랬듯이, 부모는 그저 子息을 바라봐주는 "유령"이 되어 줄 수 밖에 없다.
좀 더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면,
자식을 바꾸려는 노력이 아니다.
최소한 부모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할 수 있다면 남는 것은 그냥 관심을 가지고 자식을 바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부모라면
자신의 위해서, 그리고 자식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지 못하면, 아버지에게 느꼈던 단점들과 부모 자신이 스스로에게 느끼는 단점은 그대로 자식에게 넘어가게 된다.
아이가 있는 그대로의 自身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면,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면,
自身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기를 바란다면,
아이가 행복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면,
부모는 최소한 자신을 사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 하나쯤 사랑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를 마음껏 사랑하는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유전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이면서,
그것이 "유령"으로서의 부모가 할 유일한 역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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